북장사 원패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7-13    조회 : 4501


   공간에 대한 치장에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예외적인 곳은 권력의 공간과 신의 공간이었다. 일상의 공간인 주택의 규모는 사대부라고 할지라도 99칸을 넘지 못하게 했고, 주택에 색깔 있는 치장은 금지되었다. 그래서 흔히 보는 조선시대의 주택은 기와의 검은 색과 기둥, 서까래, 마루 등의 나무색, 벽의 흰 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에 견주어 권력의 공간인 궁궐이나 관청은 기둥과 서까래에 단청을 칠해서 다소 화려하게 꾸밀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화려한 공간은 바로 사찰이다.

  사찰은 불교 신의 세계로 부처의 공간이고, 인간이 나아가고자 하는 극락의 공간이다. 부처의 세계는 온갖 아름다움이 깃든 세계라고 여겼기 때문에 부처를 모신 건물의 기둥과 포작, 서까래에 화려한 색채를 조화시킨 단청을 칠하는 것은 물론 벽체 안팎으로도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부처의 공간을 장엄하였다. 사찰 안에서도 가장 화려한 공간은 바로 부처를 모신 불단佛壇인 수미단須彌壇일 것이다. 수미단에도 연꽃, 모란꽃 등의 각종 꽃과, 새, 물고기 등 여러 동물을 조각하고 적색, 청색, 황색, 백색 등 각종 빛깔로 색을 칠해 아름답게 꾸몄다. 그 수미단 위에도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는 여러 공양물을 두었는데, 원패願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  원패는 불·보살의 명호名號를 적어 불단에 봉안하던 불명패佛名牌로 일종의 위목대位目臺이다. 이것은 아마 제사를 모실 때 선조의 명호를 적어 모시는 위패를 불교에서는 불명패로서 만들어 모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존하는 원패 가운데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여래 등 불·보살의 명호를 적은 것보다는 ‘주상전하수만세 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의 내용을 적어놓은 원패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패가 명호를 적는 것에서 나아가 발원 내용을 적어놓는 것으로도 발전했기 때문일 것인데, 부처를 받드는 공간에 세속 권력의 정점인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를 축원하는 발원을 함께 모신 점이 흥미롭다.

  


  북장사 원패는 이처럼 세속 권력의 ‘삼전三殿’을 적어 모신 조선시대 원패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사찰들에 전해지는 원패가 명호는 삼전 가운데 하나가 쓰여 있는 것이 있지만 삼전의 원패가 온전히 갖추어진 것이 드문 데 견주어, 이 북장사 원패는 삼전패가 모두 함께 잘 남아 있는 드문 예이다.

  북장사 원패는 발원 내용을 적은 명패 부분을 능화형 장식이 둘러싸고 있고, 아래쪽에는 부처의 대좌와 같은 모양의 팔각 대좌를 갖추고 있다. ‘주상전하수만세’ 원패가 121.5cm로 가장 크고, ‘왕비전하수제년’과 ‘세자저하수천추’ 원패는 117.5cm로 다소 작다. 그러나 이 크기는 70~80cm의 크기의 다른 원패들에 견주어서는 매우 큰 편에 든다.

  원패는 불단에 올리는 공양구로서 부처의 명호나 발원내용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명호를 둘러싼 장식을 매우 화려하게 꾸민 것이 많다. 원패는 단순히 패의 아래쪽에 연화대만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그 위에 구름 문양등을 조각하여 비석이나 탑 등의 옥개석屋蓋石처럼 나타내는 경우도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능화형菱花形 주연周緣을 지닌 몸체 부분을 연꽃무늬 대좌臺座에 결구시킨 모양이다. 가운데에 적힌 발원 내용을 둘러싼 능화형 부분에는 모란꽃, 연꽃 등 화려한 초화문으로 장식한 경우도 있고, 용이나 봉황 등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을 조각하여 꾸민 것도 있다. 적색과 녹색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물론 황색과 백색까지 조화시켜 꾸미기 때문에 원패의 모습은 대개 매우 화려하다.

  이처럼 오색으로 찬란하게 꾸민 다른 원패들에 견주어 북장사 원패는 황금색과 붉은색만으로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면서도 현란하지 않은 위엄을 갖추고 있다. 북장사 원패는 발원내용을 적은 면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그 안에 황금색으로 글씨를 써서 글씨가 매우 두드러진다. 명호를 둘러싼 능화형에는 투각으로 용을 조각하고 금분을 입혀 채색했던 것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능화형의 윗부분에 여의주를 쥐고 몸을 뒤틀면서 구름 속을 나르는 용이 한 마리 있고, 양쪽에도 각각 용이 한 마리씩 창공에서 승천하는 모습을 새겼다. 아랫부분에는 구름만으로 단아하게 조각했다. ‘왕비전하수제년’과 ‘세자저하수천추’ 원패가 뒤쪽을 주칠이 된 널빤지로 마감한 데 견주어, ‘주상전하수만세’ 원패만큼은 앞뒤로 투각을 해서 뒤에도 정성을 들였다. 옆에서 보면 거의 8cm 정도에 이르는 두께의 나무를 겉에서뿐 아니라 속까지 파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지금은 용을 채색했던 황금색이 박락되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깊이와 섬세함을 두루 갖춘 이 원패가 불단 위에서 황금색으로 빛났을 모습을 상상해 보면 자못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왕비전하수제년’에는 쓰인 명호를 둘러싼 가장자리 부분에 좁은 노란 띠가 한 줄 남아 있다. 명호 아래쪽에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양쪽에 노란 띠를 둘러 명호를 한층 돋보이게 했던 듯하다. 이 구멍은 다른 원패에도 마찬가지로 나 있다. 원패를 받치는 대좌에는 단정한 주칠朱漆을 했는데, 이는 원패의 화려한 능화형 부분과 대조되어 원패가 한층 화려해 보이도록 한  배려였을 것이다. 대좌는 팔각 평면으로 상대와 중대, 하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는 4단으로 층을 이루며 좁아졌고, 중대의 앞면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꽃모양을 단아하게 투각했다. ‘주상전하수만세’는 국화꽃을 정면상으로 투각했고, ‘왕비전하수제년’과 ‘세자저하수천추’는 모란꽃을 투각했다. 상대의 윗면에는 팔각의 모서리와, 전후면의 중앙에 역시 파인 부분이 있어, 빙 둘러가며 난간 형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원패는 각각 주상전하와 왕비전하, 세자저하를 모신 전당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원패 가운데 이런 원패가 많이 있는 것이, 당시 왕실에서 사찰에 발원한 것인지 또는 각각 사찰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석가, 아미타, 약사여래가 모셔진 송광사 대웅전에도 주상전하와 왕비전하, 세자전하를 모신 원패가 전하는데, 불상의 복장에서 수습한 <불상조성기>에는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니, 불상 조성과 함께 이러한 내용의 원패를 함께 모셨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다른 내용이 쓰인 원패로는 범어사에 ‘시방삼보자존十方三寶慈尊’ 패, ‘석가여래위釋迦如來位’ 패 등도 있다.

  


  이 원패가 전해져 내려온 북장사北長寺는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천주산天柱山에 위치한 사찰로, 현재는 직지사의 말사이다. 이제 와서는 극락전, 명부전, 삼성각만을 갖춘 아담한 사찰이지만, <북장사 사적기>에 따르면 9세기에 신라 진감선사가 주석했던 곳이라고 하여 오랜 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의 많은 다른 사찰들처럼 전우가 소실되는 일을 겪어 17세기에 들어 재건되기에 이른다. 인조 2년(1624)년부터의 불사가 효종 원년(1650)에 대강 마무리되었으나 8년 만에 다시 화재를 만나는 불운을 입어 처음의 터를 버리고 길지를 찾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신북장사新北長寺라고 하였다. 이후 북장사는 매우 번성하여 극락보전, 화장전, 원통전 등 20여 당우를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

  북장사 원패는 이처럼 화려했던 시절의 북장사를 엿보게 해주는 유물이다. 현재 직지성보박물관에는 북장사의 유물로 이 원패 3점을 비롯해서 각각 모란무늬와 연꼿무늬를 화려하게 조각한 목조 경장 한 쌍, 황룡과 봉황, 학과 비천이 구름 사이에 노니는 문양이 조각된 소통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크기에 있어서나 조각 솜씨에 있어서나 조선 후기의 목조각 가운데 빠지지 않는 유물들이다. 또한 북장사에는 1688년에 조성된 13m가 넘는 영산회괘불이 있는데 구도의 짜임새나 색채의 조화가 매우 아름답다.

 

 

목수현(직지성보박물관 학예실장)